어느 땅에서든 풀과 나무는하나의 태양으로 두근두근 꽃을 피웁니다불면의 횃대 너머, 없어도 존재하는 과거 속현실보다 가깝게 남명의 후광이 빛납니다한 뿌리로 이어지는 선인의 발자취를 따라옥고의 가르침을 받는 시간입니다사치스러운 몰락을 경계하며가슴속에서 울리는 성성자惺惺子새는 날면서 흔적을 버리고사람은 살면서 자취를 남기고자 하나영혼에 새긴 뜻은 자신과 이웃을 지킬 힘이 있다, 고 하신선생의 말씀이 오래된 무지를 깨웁니다비워도 남아 있는 욕망의 혀끝이 아려오면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허용이라는 것에, 귀가 밝아질 때까지마음의 격랑을 잠재우며
이어서 계속>>>4.선비사상과 민본?외민?애민정신1) 출처사상과 벼슬살이 문제 유학에서 출처사상은 곧 은일사상과 통하며, 공자가 당시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산림에 숨어사는 사람들을 말한 데서 출발한다. 즉 '고금의 인물을 제대로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그 기림과 비판을 논하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공자는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지로운 나라에도 살지 아니하며, 천하세상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 나타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출처라는 것은 세
이어서 계속>>>지방에 그 거점을 마련한 재지교육으로 이어져서 한국의 추로지향이라는 명예를 심어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앞서 기술 한 바와 같이 그는 일찍이 제자의 경전을 숙독하고 생원 진사 시험에서 수차례 급제한 바 있으나, 25세를 기준으로 하여 산림에 처하게 되는데 안연과 같이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지배층이 말로만 떠들 뿐 전혀 실속이 없음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밖으로 왜구가 자주 침몰하는 위기의 시대를 대응하기 위하여 고뇌하였으니, 그 인식과 고민은 그의 독특한 실천
남명 조식(1501~1572)은 1539년 30세에 김해 대동에 '산해정'이라는 강학 장소를 열고 자신의 학문과 수양을 닦기 위해 18년간 지냈다. 남명은 그 이후 출생지인 합천 삼가로 돌아가 '뇌룡정'을 짓고 인근 儒子(유자)들에게 교육의 장을 열고 60세 이후부터는 지리산하 시천면에 '산천재'를 짓고 강학의 장소를 옮겼다. 김해는 부인의 친정과 딸이 출가하여 살고 있었고 늦게 얻은 외아들이 병사하여 묻힌 곳이기에 합천으로 이거 한 이후에도 수년간 김해를 왕래하여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한·일 군사정보협정(지소미아)파기 이후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북한은 이런 틈새를 노리고 계속 신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군사력을 최고 단계까지 올리려고 방사포 등 탄두 미사일 발사를 실험하여 성공률을 높이고 있다. 한반도의 위험한 요소를 막을 방도가 군사 정보력에 있다면 한·미·일은 군사 동맹국으로서의 우의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무역 전쟁이 한국경제를 긴장시키고 미중 무역 보복이 동북아 안보까지 장담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의 핵무장을 직접 위협 받는 한국은 미·일과의 공조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수출절차간소화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키로 결정한 일본 정부 각료회의는 지난 2일 오전 10시 10분 만에 끝났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일본 징용 문제를 경제 제제로 보복하려고 수개월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던 터라 이날 논의도 토론도 없이 보복 결정을 내렸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사전에 일본 정부에 대한 대응 조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예측되는 시태에 대응 준비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일본을 잘 아는 것 같아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안이한 감이 있다. 일본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우리를
지금 한국 경제는 안팎으로 극심한 시련을 맞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가와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오래동안 명쾌하게 풀어 낼 수 없는 딜램마에 빠져있다. 최근 일본의 무역보복은 우리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생산에 치명타를 주고 있다. 이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고는 양국 모두에게 피해가 크지만, 경제 규모로 봐서 우리의 경제가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더 극심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우리와 가장 인접한 지역으로서 전통적으로 동질성이 많다. 여기서 동질성을 역사적인 관점서 외면한 일본인의 삶의 태도는 우리와 영판 다르다
지난 4일 일본기업가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마사요시) 재일교포 3세가 한국에 와서 청와대와 대기업 총수들을 만났다. 그는 세계 100위 내의 부자(일본 1~2부자, 선친고향 대구 동구 도동)로 2018년 9월 '포브스' 발표에 의하면 재산이 24조 5천억 원으로 일본서 야나이다라시 유니클로 창업주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한다. 손 회장의 인공지능 '쿠팡' '소프트' 기업과 '유니클로'는 한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손 회장은 청와대에서 "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인공지
이웃나라 일본은 한반도 정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1억3천을 능가한 인구와 거대한 섬이지만 전국토의 면적의 활용도가 높다. 인공위성서 보면 일본은 바위산을 뚫어서 전국토를 조림하여 70%가 녹색 땅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우리로부터 유학儒學을 받아들여 공자의 ‘인의예지 仁義禮智’의 실천 사상을 자국에 맞게 적용하여 국민 교화로 정착하였다. 고대 선진 문화(유교,불교등)를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서 받아들여 발전을 했지만 오늘날 일본은 우리를 능가한다. 그 원인은 여러
19세기 영국의 용감한 장군 쿠웨인 경은 어느날 산종을 가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여인의 외마디 소리를 듣게 되어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곧 한 여인을 보았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그녀가 대단한 미녀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런데 돌연 그녀는 마녀로 돌변하면서 쿠웨인경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 뒤 그는 겁쟁이가 되어 전쟁터에서 적군만 보면 갑옷 속에 오줌을 싸곤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뒤에 용기를 되찾았는데 그것은 어느 미녀와 잠자리를 하고 나서부터 원래대로 회복했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지난 5월 24일 김해 사충단 표충회(四忠壇 表忠會)가 주관하고 김해시가 후원하는 임진왜란 때 김해지역을 방어한 의병장 네 분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엄숙하게 진행됐다. 이날 사충신의 문중을 비릇하여 경상남도 유림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날 필자가 참석해 느낀 바를 글로 남기고자 한다. 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 총 병력 20여만 명의 왜군이 부산을 통해 3진으로 나누어 조선의 강토를 침입 유린하는 큰 전란이 발발해 이후 7년간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준 치욕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러기까지 조정에서는 왜적
근심과 설움이 없는 세상살이 그건 지상낙원이다. 문 밖에 나서면 뭇군상들의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내가 사는 집에서 도시철도로 가는 길모퉁이 전봇대 밑에는 수년 째 노인이 쪼그리고 앉아 우산을 손질하거나 그 일이 없으면 폰을 검색하며 하루 종일을 보낸다. 요즘 같이 풍요로운 세상에 우산을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지 고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버리고 간 우산을 주워서 열심히 손질하고 있으면서 지나가는 행인을 쳐다 보지도 않고 말을 거는 사람도 없다. 오후가 되면 늦은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낙천적인 모습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
지난 호에 '지나친 소유욕은 행복을 잃는다'고 하는 김형석 교수님의 말을 인용하여 기술하였는데, 행복은 경제적인 여유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자신이 노력을 하여 얻는 부는 권장해야하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 자체가 행복한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삶에 의욕이 없고 매사에 부정적인 자세로 살아가기 일수다. 그런데 예외적인 나라가 있다. 부탄은 인구 80만에 일부다처제로 히말라야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1907년 우겐 왕 추크가 즉위한 이래 세습군주제가
달포 전 부산의 국민행복추진본부에서 김형석 교수님을 모시고 '행복한 삶'에 대한 포럼을 한 적이 있다. 김형석 교수님은 올해 101세의 노 철학자로 아직까지 왕성한 강연과 집필로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말씀으로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70년대 초 대학재학시절 강의를 들은 제자로서 40여 년 만에 보니 가슴이 설레였다. 당대 대 지성인으로 안병욱 교수님과 함께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다. 이날 주제 강연의 요점은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거나 실천을 꺼리는 평범한 말씀을 예전처럼 역설하였다.
민인호(閔麟鎬 1884~1950)는 산청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 강점기에 탁지부 주부를 거처 김해군수(1924~1926)를 지낸 엘리트 관료로서 김해지역 문화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일제통치하에서 군수를 지냈지만 군민을 수탈하지 않고 지역민과 친숙하게 지냈기에 존경받았다. 민군수의 큰형 민용호(閔龍鎬 1869~1922)는 산청에서 출생하여 남명의 정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로,1895년 일본의 자객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1895년 10월 8일 발생하자 전국적으로 반일 의병이 일어났다
공자가 재나라 국경을 지나다가 뽕을 따는 두 여인을 보았는데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구슬처럼 아름답고, 서쪽에서 뽕을 따는 여인은 박색이었다. 공자가 이 광경을 보고 농을 하기를 '동지박 서지박(東枝璞西枝縛)' 이로고. 즉 동쪽 가지는 구슬박이고 서쪽 가지는 얽은 박이라는 뜻이다. 이러자 서쪽 여인이 공자를 힐끗 보더니 '건순노치칠일절양지상, 이백어면천하명문지상 (乾脣露齒七日絶糧之相, 耳白於面天下名文之相)'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즉, 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툭 튀어 나
시골 한 사찰에 끈으로 묶은 소포상자가 도착했다. 행자 승이 가위로 끈을 자르려고 하자 노스님이 끈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 보라고 한다. 가위로 끈을 싹둑 자르면 빠르고 편리 하지만 수행하는 자세로 하나하나 풀어 나간다면 그 끈을 다음에 재활용 할 수 있다는 취지다. 우리 생활에서 이같은 사례를 수없이 접한다. 재활용을 염두에 두기 보다는 빨리 해결하려는 조급한 마음을 통제 못하는 물질 세태로 인해 쉽게 사서 얼마 뒤에는 버리고 만다. 특히 아파트 생활에서 가구나 책, 옷 등이 공간을 많이 차지하면 집안이 지저분하기 일쑤다. 이런
지난 해 7월 중국 내몽고 지역을 관광하기 위해 숭덕을 갔다. 평소 숭덕을 가고 싶은 차에 큰 기대를 하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을 놓치지 않고 보려고 애썼다. 숭덕에는 1780년 정조시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0~1805)이 선배 홍대용이 중국 연경(북경)가서 보고 느낀 것 중에서 과학 지식을 듣고서 심취하였다. 그는 청나라 문화의 좋은 점을 배워 조선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지론을 펴면서 현실 문제에 대하여 예리한 비평을 가한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로서 한때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내가 내몽고 패키지여행에 들
한국인의 사유는 연역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전체 속에서 개별적 특수성을 부여하면서 통각적(通覺的) 직관적(直觀的) 전개의 사유과정이 발달되어 있다. 이 속에는 인간 생명에 대한 조화와 질서 의식이 자주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앎의 단계에서 지식 보다는 느낌과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전한다. 이같은 예를 들면 남녀 간의 은밀한 애정표현의 경우 마음으로 느끼는 감성이 먼저이므로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확실한 인식을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선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