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

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

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 

김은미 글, 그림 / 온다프레스 / 92p / 1만원

 

 

 

 

 

 

 

어린 시절을 김해읍에서 자랐다. 그 때를 생각하면, 장날이 가장 흥겨웠다. 성가셔하는 어머니를 끝까지 졸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장터에 따라갔다. 장터에 들어서면 나는 어머니 손을 놓고 장터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에 바빴다. 요즘으로 치면 백화점 안을 돌아보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정도는 어림도 없다.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이 많은 물건들은 다 무엇이며, 어디에 쓰는 걸까. 단조로운 일상을 깨워주는 왁자한 장날, 나는 신기한 문물을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바빴다. 장터를 쏘다닐 만큼 쏘다니다가 고소한 냄새를 따라 통닭을 튀겨내는 가게 앞으로 가는 게, 어린 나의 마지막 목적이었다.

 커다란 튀김솥 속의 통닭은 장날의 행복이었다.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오는 길, 나는 세상을 모두 가진 듯 행복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릴 적 김해장날처럼 풍성하고 기꺼웠던 장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김해 새벽시장을 기억한다. 언젠가 취재를 위해 한겨울에, 새벽 2시부터 아침까지 경전철 부원역에서 새벽시장을 내려다보며 시간별로 사진을 찍고 상인들의 모습을 바라본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피어나는 화톳불, 천막을 세우고 전을 펴는 사람들, 그리고 밝아오는 아침을 보았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새벽시장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백화점, 대형마트, 온라인쇼핑몰에 손님을 빼앗기는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힘들다고 한다.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온 탓에 농부들의 시름도 깊다. 그러나 곧 추석이 다가온다.

 풍성한 김해의 시장에서 추석을 준비하는 상인도, 손님들도 넉넉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작가 김은미 씨가 재래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아낸 <이야기를 그려드립니다>이다. 시장 상인들의 일상은 물론, 현장감을 넘어선 상인들의 상상과 꿈, 시장을 찾아온 사람들을 짧은 말과 작은 그림들로 풀어낸 책이다.


 김은미 씨는 열 달 동안 성남 모란시장을 매일같이 찾아갔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상인들 곁에 앉아서 그들의 인터뷰를 한편, 한편 그림으로 옮겼다. 시장상인들이 내어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하루 종일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이불 납품 중개상을 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문에 직접 장사를 시작한 이불 상인, 과수원을 하는 부모 아래서 자라 30년째 화초를 파는 자매, 평생 시장에서 같이 일하다 무릎관절이 나빠져 수술 받은 아내가 퇴원하면 제주도 구경을 가겠다는 상인, 낚시를 좋아해서 아내에게 자주 혼났지만 물고기 장사를 한 뒤로 혼나지 않는다는 상인, 다섯 딸에 손주들까지 칠십 평생 아이만 키워 누구보다 여성 아동복은 잘 고른다는 30년차 아동복 상인…. 책에는 시장이 펼쳐진다.

시장에는 사람이 있고, 사연이 있다.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처럼 짧은 글과 그림 속에 있다.


 이 책에서 본 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여자 손님이 꽃무늬 치마를 입고 서서 자신에게 옷이 어울리는지 살펴보고 있는 장면이다. 가게 주인인 할머니가 경상도 사람인가 보다. 손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말이 그림 옆에 옮겨졌다. "그 치마 딱 니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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