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백의(白衣)를 입었나? (3)

전경배 인제대 초빙교수

 삼국시대 복제를 보면, 의복에 사용된 붉은색, 보라색, 갈색, 노랑색 등 다채로운 색을 내는 염료로는 단사(丹沙), 황토(黃土), 갈토(褐土) 등의 광물과 녹청(綠靑), 호분(胡粉) 등의 화합물, 홍화(紅花), 자초(紫草), 소방목(蘇方木), 옻(漆) 등의 식물성 염료가 사용되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염궁(染宮), 홍전(紅典), 소방전(蘇芳典), 찬염전(?染典) 등의 염색을 전담하는 전문 수공업 공장에, 모(母)라 불리는 전문기술을 가진 여성들(염궁 11인, 기타 각 6인)이 일을 할 만큼, 염색이 전문화 되었다.
 
 서기110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이 쓴 계림지(鷄林志) 에서 "고려에서는 염색을 잘하는데, 홍색과 자색이 더욱 묘하고, 자초의 굵은 뿌리로 즙을 짜서 비단을 물들이면 매우 아름답다"고 한 것을 볼 때, 고려시대에는 염색기술이 더욱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3대 왕인 태종은 백관복 제정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여러 의례에 대한 정비를 위해 '관복색'을 설정하여 관리하였다. 백관의 조복, 제복, 공복, 상복의 제도가 완성된 것은 세종대였으며, 이때 의례상정사로 하여금 경제속육전을 올리게 했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오례의주를 상정시켰으며, 제8대 예종 때에 경국대전으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경국대전 복식금제제도, 경공장에 청염장, 황단장이 분업화되어 염색을 색별로 관장하였다. 태종은 국초에 백색금지, 경천사상으로 쪽염을 많이 했으며 왕복은 자색을 띤 홍색으로 하였고 궁중의 염색 색깔은 오방색, 오간색 등으로 다양한 염색기술을 보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 쓴 성호사설 제12권 인사문 홍의(紅衣)에 기술한 내용을 보면, 화가(畵家)의 단채가 왜(倭)에서 사온 것은 불에 사르면 수은이 되니 이것을 분명히 단사(丹砂)로써 만들 것 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사온 것은 비린내만 있을 뿐 수은이 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성성이(猩)피로써 만들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림 그리는 물감으로 사용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실 종류를 염색하는 것 같은 것이 처음에는 주토(朱土)를 사용한 것은 토홍(土紅)이라하고, 소목을 사용한 것은 목홍이라 하고, 홍람을 사용한 것은 진홍이라고 한다. 목홍은 무명베에 적합하지 않고 빛깔이 선명하지 못하니 지금 숭상하는 것은 다 홍람으로 염색하는 것이고 토홍은 주로 물로써 그 찌끼를 없앤 뒤에 아교를 섞어서 염색하는 것이다. 국조에서는 이를 최상의 빛깔로 여겼으니 이른바 토홍직령이라는 것인데 세속의 음에 토를 변하여 도(桃)라 하면서도 그 와전인 됨을 모른다.
 
 옛날에 "우리의 연지산을 탈취하니 부녀들이 안색이 없다"라는 말이었으니 토홍은 필시 세상이 점점 교만하고 사치해져서 귀한 사람이나 천한사람이나 다 홍람을 사용하기 때문에 토홍은 드디어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조상은 흔히 백의민족이라 하지만 왜 흰옷을 좋아했는지, 분명치 않다. 고려이후 조정에서는 풍수설이나 절약운동 같은 이유를 들어 흰옷을 입지 못하게 했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때나 대한제국에도 색옷을 입어라 권장했으나 사람들은 흰옷을 계속 입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생활방식을 깨뜨리는 뜻에서 색 옷 입기를 줄기차게 밀고나갔다. 여기서 색옷이아란 검은 옷을 뜻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흑색견습생을 모집하고 검은 색의 좋은 점과 물들이는 방법 등을 교육했다.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 말단조직인 군, 면 등이 앞장서 생활개선운동을 할 때 흰옷을 벗고 색옷을 입으라고 다그쳤다. 일제는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운동에서도 흰옷폐지를 목표로 삼았다.

  색옷입기 성과가 크지 않자 일제는 유령이 입는 옷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장날에는 관리가 '색의 장려'를 새긴 큰 도장을 흰옷 위에 찍었고 검정물이 든 물총을 쏘기도 했다. 황해도에서는 상을 당한 사람에까지 '색옷 장려' 행동을 해서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그밖에 관공서 앞에 '백의 중독자는 출입을 금 한다'는 간판을 달고 면사무소와 관공서 등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공사판 인부를 채용하지 않았다. 서약서를 쓴 다음에도 계속 흰옷을 입으면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색옷을 많이 입은 실적이 좋은 마을에는 표창을 하거나 염료를 무료 또는 아주 싸게 주는 유인책을 썼다. 태평양 전쟁으로 사치품 금지령이 내려지는 1940년대가 되면서 패션은 점점 우중충해졌다.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7월 '적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눈에 잘 뛰기 때문에 흰옷을 벗자'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제 하의 흰옷말살정책이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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