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김해향토문화연구소장

 

김종간 김해향토문화연구소장(전 김해시장)이 지난 6일
국립 김해박물관에서 열린 '미친美親 소리 가야 가락 금관 그리고'
출판 기념식에서 자신의 저서에 사인을 하고 있다.

김종간 김해향토문화연구소장 
'미친美親 소리 가야...' 펴내

 

 "허 기자! 니도 알지마는 내가 수십 년 전부터 가야를 이야기하고, 인도에서 온 허황옥이 차를 처음 국내에 들였다꼬, 씨불고 댕길때 내 보고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안한 사람이 오데 있노? 전부 내보고 미친놈이라 안켓나? 내가 가야를 이야기 할때 콧방구도 안뀌던 사람들이 지금은 가야사 살린다꼬 난리다. 참 격세지감이다."
 
 김해 하면 가야가 떠오르고 가야 하면 연상되는 김종간 김해향토문화연구소장(전 김해시장)이 가야의 역사를 풀이한 '미친美親 소리 가야 가락 금관 그리고'를 펴냈다.

 그는 "한문으로 된 가야 관련 옛 문헌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해 가야 가락국의 역사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 책을 내게 됐다"고 했다.
 
 '미친美親 소리 가야 가락 금관 그리고' 출판 기념식은 제25호 태풍 '콩레이'가 남해안을 통과하던 지난 6일 국립김해박물관 대강당에서 성대히 열렸다. 이날 김해지역은 태풍의 영향으로 강한 바람을 동반한 많은 비가 내렸다. 하지만 출판 기념식이 열리던 시각에는 다행히 비바람이 잦아들어 행사 진행에 차질은 없었다.
 
 이날 날씨도 굴곡 깊은 그의 삶과 닮았다. 국회의원 비서로 시작해 가야사를 연구하던 역사가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다, 50만 인구를 넘나들던 시절, 김해시의 지존 자리에 올라 가야 뜰을 호령했지만 낙선에 이은 구속까지 굴곡 깊은 삶을 걸어왔다. 비단과는 결이 다른 억센 시간을 지나왔지만 '가야' 만큼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곁에 두던 이가 바로 김종간이다.

 "1천300리를 흘러오는 낙동강이 마르지 않는 한, 가야사는 결코 어둠에 묻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가야의 역사와 문화의 모태인 낙동강이 쉬지 않고 흐르기에 가야사의 어둠은 꼭 밝혀질 것이다."

 그는 18번째 저서 '미친美親 소리 가야 가락 금관 그리고'를 소개하면서 지난 1987년 그가 세상에 내놓은 '가야의 얼을 찾아서'의 일부를 언급했다.
 
 30여 년, 선 굵은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가야를 품었던 그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가야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80년대 초반 민한당 소속이었던 신원식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내던 즈음이다. 당시 경남에서 유일했던 야당 소속 국회의원 신 의원에게 한국일보 기자가 김해와 관련이 있는 가야에 대한 글을 써 주길 부탁했고, 신 의원의 글쓰기를 도우면서 '가야, 가락국' 공부를 시작했다.
 
 "신 의원 비서관으로 있을 때, 당시 한국일보 기자 한 분이 찾아와 '김해는 가야 문화의 확산지라고 하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으며 가락국을 이야기하더라. 그때 나도 가야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가야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역사학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동국대 교수 한 분이 가야를 알려면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어야 한다고 조언하더라. 가야를 알아가면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 하고, 김해를 더 소상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1987년 7월17일 가야문화연구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7년 3월1일 향토문화연구소를 열었다.
 
 그는 "경제적 사정으로 3회에 그치긴 했지만 당시, 허황옥이 인도에서 들여온 '차'를 이야기하고, 198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기도 했다"고 회상하면서 "당시 내가 했던 일들이 가야사 1단계 사업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가야는 금관 가야와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의 6개 연맹체로 구성됐다.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후가 있던 김해는 금관 가야로 불리며 6개 연맹체 중 으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김 소장은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가야의 주인이었던 김해는 '가락 가야'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신라에 가야가 병합된 이후 법흥왕이 자치주 이름으로 '금관'이라고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금관(金官)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가야의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만들어진 신라의 자치주 이름이었다. 가락국의 왕이던 김수로의 후손과 그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법흥왕이 내려준 것이다. 법흥왕이 쇠를 잘 다루는 가야인들의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그는 고대가요인 구지가에 대해서도 백성이 지도자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가야의 특이점 4가지를 강조했다. 백성이 지도자를 추대했고, 최초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그리고 자식에게 어머니가 성씨를 주는 남녀평등이 실천됐고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결혼이 시행된 걸로 보아 인종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야를 찾는 것이 김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향토 문화 연구와 가야 문화를 알아가는 데 전념해 더 많은 시민과 가야를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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