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편집국장

 국민학교 5학년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른 아침, 가위와 풀을 찾았다. 선친께서 시키신 유일한 일이던 신문 스크랩(scrap)을 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당시에는 스케치북 보다 조금 큰 스크랩북이라는 게 있었다. 얇은 플라스틱으로 된 검은색 표지와 누른색 종이가 묶인 스크랩북과 가위, 풀을 찾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선친께서는 아침 배달되는 <조선일보>의 '만물상'을 스크랩하라고 했고, 며칠 만에 한 번씩 쥐어주시는 용돈의 달콤함을 알아버린 초딩은 매일 아침 스크랩북을 찾아 헤맸다. 반복해 스크랩을 하며 흥미와는 상관없이 '만물상'을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런 의미로 선친께서 스크랩 일을 시키신 것 같다.
 
 신문 속 사설과 비슷한 기사 형식인 '만물상'은 갓 10대에 들어선 소년에겐 신세계 그 자체였다. 이름에 걸맞게 온 세상과 우주 만상의 이치가 '만물상'에 다 있었다. 글도 그렇게 길지 않아 내용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만물상'을 읽어가며 소년은 어른이 돼 갔다. 소년에게 '만물상'은 교과서이자, 세상을 보는 눈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국회의원이 댓글 여론 조작 연루 의혹에 휩싸였다. <조선일보>의 또 다른 이름 <TV조선>이 드루킹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김 모씨가 매크로를 활용해 특정 댓글을 조작하며 현 정부를 비난했는데, 드루킹과 김 의원이 관련이 있다고 보도했다. 
 
 처음에는 <TV조선>이 드루킹과 여권의 한 현역 의원과 관계가 있다는 보도를 했고, 그러자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현역 의원의 실명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당의 공세가 이어지자 <TV조선>은 못이기는 채, 김경수 의원의 실명을 거론했다. 야당과 <조선일보>가 짜고 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다. 
  
 <TV조선>에서 김경수라는 이름 석자가 나오자마자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권은 경남지사 후보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김 의원에 대해 맹공을 퍼붓고 있다. 김 의원은 2차례 해명 기자회견을 열었고 여권은 '일부 당원의 일탈'이라며 적극적으로 방어를 하고 있다. 김 의원이 드루킹과 연결고리가 형성됐는지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니, 결과를 지켜보면 될 일이다.
 
 문제는 국민의 정서가 두 갈래로 정확히 나눠졌다는 것이다. 둘로 나눠진 이들은 한 발짝도 물러나려 하지 않으며 한 쪽 눈과 한 쪽 귀를 닫아 버린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김 의원을 보는 시각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을 두고도 '죗값을 받아야 한다'는 쪽과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하는 쪽으로 나눠졌다.   
 
 남북으로 갈라선 내 나라가 이념으로 또다시 쪼개지려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시리다. 어떤 이들은 이 사태에 대해 <조선일보> 같은 보수 언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형 언론이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갈라 치기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데 <조선일보>의 농간에 전 국민이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TV조선>의 보도 형태는 어릴 적 필자에게 신세계를 선물했던 <조선일보>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니 논조의 차이보다는 <조선일보>를 보는 필자의 시각이 바꼈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국민 분열의 책임을 모두 <조선일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조선일보>가 우측 최전방에서, 우파의 입장에 맞는 기사를 가공해 가며, 우파의 세를 모으고 있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아는 일 아닌가.  

 분명한 건 현재의 독자와 군부독재 시절 독자의 수준차다. 과거의 독자들보다 훨씬 똑똑해진 독자가 <조선일보>를 보고 편파적 보도를 한다고 주장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선일보>를 읽으며 머리가 굵어진 필자의 눈에 오늘의 <조선일보>는 측은해 보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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