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불교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기원전 약 563년부터 483년 사이에 인도 북동부 지역에 살았던 싯타르타 고타마 왕자의 출가와 깨달음, 그리고 그 사상의 전도와 포교에 의해 시작되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진화하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붓다'라고 부르며 붓다의 의미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의 명칭입니다.

 종교는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번개나 천둥 등 자연재해 앞에 무력한 인간이 그 자연재해 뒤에 ‘무엇’이 있다고 여겼고, 그 ‘무엇’이 신으로 탈바꿈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이 만들어지자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모두가 ‘만들어진 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며 이런 신들을 달래 줄 주술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런 주술사들은 바라문 계급의 최상에 위치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현실세계를 떠나 추상적인 절대세계를 그리는 일은 광명한 태양을 놓아두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린 후 어둡다고 하는 것과 같다. 눈만 뜨면 광명세계를 본다.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신을 그리는 것이 망견이다”라고 주장하고 신의 괴력, 주술 같은 이적 등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타파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에 얽매여서 무엇을 갈구한다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만사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본래 신이란 인간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인간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유일신이 탄생하면서 인간은 불행해져 갔습니다. 권력의 남용을 위해 신의 이름을 남용하는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이라크 전쟁의 부시 경우나 아프간 사태가 그 실례입니다. 종교를 이용하여 인류의 불안을 만들며 세계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현실을 극복 하는 길은 무의식의 응어리인 트라우마로 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서양의 종교는 절대지존의 자리에 인간의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을 심어 인간을 다스리는 신의 역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을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강제하여 사람들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각인 시킵니다. 이런 절대지존의 신은 없습니다. 일체만물이 원래부터 한 뿌리이기 때문에 영원히 절대 지존하며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무의식적 충동에도 이끌리기도 하지만 인간은 현재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이란 무의식과 더불어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즉 나와 너의 존엄성을 함께 긍정하고 서로 돕고 서로 가르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지혜와 자비입니다. 불교의 기본수행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번뇌와 고통이 없는 열반에 이르고자하는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도피안이라고 설명합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강의 이쪽이 차안이고 건너편이 피안입니다. 그 피안이란 죽고 나서 가는 천국이나 극락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그대로 살며 진리를 깨달은 상태를 말합니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혹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피안에 사는 사람이 있고, 지옥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의 차이는 마음이 어떤 습관에 놓여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야 좋은 습관이 마음을 이끕니다. 서양의 종교는 신에 의존하라고 하지만, 불교는 바로 지금, 바로 이곳, 세상의 주인으로서 '나'의 습관을 바르게 가지라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