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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과 가야춤, 망개떡 이야기(8)수로왕의 숨결
박경용 가야스토리협회장

 한, 예, 왜, 낙랑, 대방과 더불어 철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마님은 용왕제에서 선희가 춤추게 하였다. 바닷가에서 해풍을 마시며 추는 춤은 이미 이 세상에서 보는 춤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감동을 하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음, 선희가 춤추는 걸 보니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기분이군 그래."

 "하녀로 심부름이나 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워."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선희가 춘 용왕제로 떠난 배들은 큰 풍랑을 당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선희를 초대하는 선주들의 요청이 많아졌다. 선희의 춤을 아끼는 마님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그 아이를 춤공부를 본격으로 시키는 임호산(유민산) 아래 무접 마을로 보내라고 말했다.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마님은 선희를 무접마을로 보냈다.
 
 그 당시 무접마을은 가야 최고 무용마을로서 금벌매라는 연세 많은 무용 선생님이 있었다. 오래전 인도 무용과 집단 혹은 개인으로 춤추기를 좋아하는 가야 정서를 결합하여 만든 독특한 가야무를 허황옥 왕비의 친척 되는 분이 만들었는데 금벌매 선생은 그분의 수제자로서 전수받았고 젊었을 때는 궁중 무용수도 역임했었다. 또한 무용을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실행하는 분이었다.
 
 금벌매 선생님은 선희의 춤을 보고 타고난 소질을 가졌다고 칭찬하고 어디서 어떻게 춤을 추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선희는 사실대로 난생처음 해풍을 쏘이는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일렁이는 해풍이나 넘실대는 물결에 맞추어 추는 가벼운 동작이 춤의 기초며 원류라고 말하였다.
 
 선희에게 춤의 기본 동작부터 익히게 하면 대성할 재목이라며 제자로 받아 주었다.

 그 다시 금벌매 선생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런일이었다. 헌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악기 슬을 연주하는 총각이 선희에게 반한 것이다. 사실은 그 총각과 금벌매의 따님과 결혼을 앞둔 사이였다. 이 일을 어이하면 좋으리오. 선희와 금벌매 선생님과 딸 모두는 괴로움에 빠졌다.
 
 많은 갈등과 우여곡절 끝에 선희는 선생님 따님과의 결혼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기가 떠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후에 다시 무접마을 금병매 선생님 휘하에 들어오겠다고 했다. 선희는 춤에다 일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러나 금벌매 선생은 최고 무용가가 대개 그러하듯 과감하고 준엄한 결단을 내렸다. 선희와 청년의 결혼은 당사자의 자유에 맡기고 마을의 기강을 위해 슬 연주자를 떠나게 하였다. 그 이후 청년은 하는 수 없이 떠나가 군사 독려 음악 단체인 자충패에 들어갔다. 청년을 따르지 않고 남겠다는 선희를 선생님은 후계자로 만들어 가야무를 계승하게 하였고 따님은 백제로 시집보내는 결단을 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이 화친함을 기회로 가야는 백제, 왜와 화친하여 가야국의 국토보전과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백제와의 보다 긴밀한 화친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제의 귀족 중에는 문화예술의 수준이 높은 가야의 음악, 무용, 그림에 능한 사람을 결혼상대로 선호하는 경우가 흔했다. 결국 금벌매의 따님은 백제 귀족의 자녀와 혼인을 맺게 된 것이다.
 
 백제로 시집가는 금벌매 따님을 위해 선희는 최선을 다했다. 시집가는 따님의 이바지 음식을 만드는 일을 정성껏 도왔다. 선희는 자랄 때 어머니 곁에서 배운 망개떡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먼 길을 갈 때 오래 보존시켜주는 망개 잎을 따기 위해 마을 뒷산 임호산에 가서 잎을 땄다.
 
 옛날 유민 공주가 황세 장군과 사별하고 이 산에 들어와 수도하며 황세와 여의 낭자의 혼을 위해 빌어 주었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망개 잎을 땄다. 집에 갖고 와서 망개떡을 정성 들여 만들었다. 가야의 망개떡은 백제 시가집에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금벌매 따님은 백제에서 가야의 춤을 전수하여 백제 춤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무접마을 가야춤은 신라에도 선보여 신라왕의 격찬을 받았음을 <삼국유사>기록에도 전하고 있다. 가야춤 예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사사로우에 얽매이지 않는 금벌매 선생과 제자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ㅁ 가야궁 비빔밥과 노래

 가야 3대 마품왕 때였다. 구지봉에서 가까운 논실 동네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성이 지극한 정호라는 청년이 살았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병석에 누워계셨고 정호는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에 힘썼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애야, 꿈을 꾸었는데 흰 수염을 한 도사가 나타나 어서 지리산 취나물과 무척산의 참당귀나물로 밥을 비벼 먹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산으로 갔다. 지리산으로 가쓰나 취나물을 찾을 수 없었다. 취나물이 나기에는 아직 계곡에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미 산되지가 구덩이에 빠진 새끼 돼지를 구하기 위해 애를 태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호 청년은 가여운 생각이 들어 구덩이에 뛰어 내려가 새끼를 구해 주었다.
 
 어미 산돼지는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는 것이었다. 어느 바위 뒤로 갔다. 놀랍게도 취나물이 군락지어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여 취나물을 잔뜩 뜯어왔다.
 
 이제는 무척산으로 갔다. 역시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정상의 천지 못까지 갔으나 참당귀는 보이지 않았다. 다리도 아파 쉴 겸 못 옆에 앉았는데 옛날 수로왕이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가 생각났다. 수로왕의 묘를 팔 때 물이 자꾸 나와 이곳 무척산에 천지 못을 팠더니 물이 나지 않았다고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자 팔뚝만한 신어 두 마리가 수면 위로 떠올라 한 바퀴 빙 돌더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호 청년은 그것을 보는 순간 느낌이 오는 게 있어 얼른 신어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참당귀를 찾기 시작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참당귀 군락지가 눈에 띄었다. 참당귀 잎을 가득 뜯어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청년은 정성 들여 취나물과 참당귀로 비빔밥을 만들어 어머니깨 드렸다. 그 이후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져갔다. 뿐만 아니라 이 나물을 넣은 비빔밥을 먹으면 피부도 자주 좋아졌다.
 
 소문이 퍼져 궁중에까지 전해졌다. 마품왕의 호구 왕비는 음식 만들기에 관심이 많아 궁녀들을 정호 집으로 보내 자초지종을 듣고 오게 하였다.
 
 궁중에서는 연구하여 허황옥 공주 친정 인도 아유타에서 온 카레와 가야에서 생산되는 고추장과 파를 넣는 등 더 멋진 비빔밥을 만들었다. 가야궁 비빔밥은 맛도 있었지만 속병을 가라앉히고 피부를 좋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궁녀들이 가장 좋아하였다고 한다.

 제철소에서는 외국 주문을 많이 받다 시간에 쫓기면 비빔밥으로 능률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신라, 백제와 화친으로 결혼이 이루어졌을 때 가야 처녀들이 그곳으로 시집가면 가야궁 비빔밥을 만들어 시댁 식구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 이후 외국 사신들도 가야 궁궐에 오면 가야궁 비빔밥을 먹기를 원했고 귀국하면 자랑스러워했다고 하다.
 
 가야궁 비빔밥

 가야의 궁전에서 만드는 비빔밥은
 그 맛도 좋았지만 심신을 편캐했네
 임금과 신하들이 다같이 좋아하고
 외국의 사신들도 먹기를 원했다오
 가야궁 비빔밥이 세상에 나온 사연
 가야의 효심 많은 청년의 이야기네
 
 어머니 꿈속에서 만났던 신선 말씀
 지리산 취나물과 무척산 참당귀를
 구해서 밥에 비벼 먹으란 그 말씀에
 지리산 산속에서 산돼지 새끼 살려
 취나물 용케 얻고 무척산 천지못의
 쌍어의 도움받아 참당귀 캐었다오

 어머니 회복되고 세상에 알려졌네
 요리에 관심 많은 가야궁 호구 왕비
 가야파 인도 카레 고추장 첨가했네
 피부도 좋아져서 궁녀들 반겼다오
 가야의 예술성은 문학과 음악 무용
 음식도 빛을 발해 찬연히 빛나누나

 (후렴)
 가야궁 비빔밥아 너 이름 영원하라
 철문화 수출했듯 세계로 뻗어가리

김해일보  gimhae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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