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은 성리학을 자신의 중심 학문으로 하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리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송나라 때 여러 학자들에 이르러 의리지학(義理之學)이 해와 별처럼 분명하게 밝혀졌으니, 아무리 고명한 스승이 귀를 당겨 일러준다. 하더라도 전현(前賢)들의 가르침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오직 배우는 이들이 그것을 맹렬히 실천하느냐 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꼭 저술할 필요는 없으며, 저술이 많다고 해서 도에 밝게 통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 경향은 마치 명나라 초기 사상계의 동향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감이 있다. 사실 명대 초기에는 사상계가 극단적으로 활기를 잃고 있었다. 이미 주자학 일색이 되어서, 진리는 일찍이 주자에 의해서 궁구되었으므로, 남은 것은 실천뿐이라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남명은 선비가 지식만을 추구하는 것을 일생토록 부끄럽게 여겼다. 후학들이 저술로 이론을 세우는 것을 경계해 마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 저술에 대해 상당히 절제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남명이 저술을 배척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정주(程朱) 이후에는 꼭 저술할 필요는 없다'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역시 실천이 병행되지 않는 이론 위주의 학문 경향을 비판하고 실천궁행을 강조했다는 데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뒷날 강화학파의 이건창(李建昌)이 "세상에서는 선생께서 저술에 종사하지 않은 것만을 보고 간혹 '약례'에만 힘썼다고 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 어찌 선생을 안다고 하랴." 라고 하였던 것은 적절한 지적이라 할 것이다.
남명은 당시 학자들이 옛 사람들과는 달리 실천을 등한시한 채 이론 탐구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걱정하면서, 이론 위주의 학문을 귀로 듣고 바로 입으로 떠드는 학문(耳之學)'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글을 보는 데 있어서도 단편적인 문장구절에만 매달리지 않고 근본 취지를 잘 이해하여 실천에 힘쓰고자 하였으며, 강의 토론이나 변별해석을 즐겨하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늘 고민하였다.
남명은 학문을 함에 있어 자득(自得)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는 항상 "나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단지 잠든 혼을 깨울 뿐이다. 그들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고 나면 능히 천지일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자득과 분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주입식 교육, 지식 위주의 교육이 만연된 현대의 교육 풍토에서 볼 때 큰 시사점을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교육사》를 저술한 이만규(李萬珪)가 남명을 우리 나라 교육사에 있어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새겨볼 가치가 있다고 보겠다.
남명은 당시의 학자들이 고상하게 성명(性命)을 말하기만 하고 실행이 부족 한 것에 대해 '이것은 마치 저자 거리를 지날 때 진기한 보배를 구경만 하고 부질없이 비싸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실제 한 마리 생선을 사는 것만 못하다' 고 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가르침은 앞선 유학자가 이미 다 밝혀 놓았으니, 배우는 자는 그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지 못함을 걱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항상 배우는 사람들에게 '인사(人事)를 통해 천리(天理)를 구하지 않고, 문득 '성명'의 심오함만 탐구하려 한다면 끝내 실제 이득이 없을 것이다." 라고 경계하곤 하였다. 이를 보면 그의 학문은 비근(卑近)한 것으로부터 고원(高遠)한 것으로 올라가는 '하학상달'의 방법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명은 퇴계 이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시 학자들이 성명리기(性命理氣)를 논하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하는 세태를 풍자하되, '근래 배우는 사람들이 손으로는 물뿌리고 비질하는 범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이름만 도적질하고, 이로써 남을 속이려 하다가 도리어 상처를 입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미치게 한다'고 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퇴계의 역할을 촉구하였다.
또 남명은 퇴계가 실천보다도 이론 추구에 힘쓴다고 비판하면서, 그 폐단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하여 "요즘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겉과 속이 다르게 헛된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고질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그러하여 이미 혹세무민(惑世誣民)을 걱정할 정도이며, 비록 대현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는 실로 유학의 큰 어른(퇴계)께서 오직 상달(上達)만을 주장하고 하학(下學)을 강구하지 않아 구제하기 어려운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남명은 제자인 오건에게 보낸 서한에서, "심오한 천리를 말하고자 하면, 내 이찌 남들보다 못하겠는가 마는, 그 점에 대해서는 기꺼이 말하고 싶지 않다." 라고 하였으며, 역시 제자인 하항(河流), 유종지(柳宗智) 등이 매양 성명지리(性命之理)를 담론하면서 부지런히 힘쓰자 이에 대해, "하학과 상달에 절로 단계가 있거늘, 제군들은 이를 아는가 모르는가" 라고 책망하였다 한다.
혹자는 남명이 그저 실천 유학자였을 뿐 성리학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자칫하면 남명의 학문을 단순한 소학적(小學的) 실천의 단계에 머무는 것으로 평가하기 쉽다. 그리고 남명의 실천 중시적인 학문 특성을 근거로 그를 양명학자로 지목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남명의 '실천유학 정신은 지행합일을 주장하는 양명학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도학까지도 하나로 만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남명은 올바른 실천과 행동을 위해 결코 궁리(窮理)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궁리를 도외시한 채 비근한 말절(末節)에만 힘썼던 학자가 결코 아니었다.
인사(人事)로부터 천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으며, 당세와 관련하여 세상의 폐단을 구하기 위해 천리(踐履)에 비중을 두어 더욱 중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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