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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세(1546년)
봄에 어머니를 삼가에 있는 아버지의 묘 옆에 장사 지내고 삼년의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47세(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벗인 규암 송인수가 화를 당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마치고 삼가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거주하였다.
48세(1548년)
조정에서 유일로 천거하여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토동의 옛집 옆에 계부당을 지었는데, 닭이 알을 품듯이 덕을 함양하겠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또 시냇가에 뇌룡정을 지어 강학의 장소로 삼았는데,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
가 용처럼 드러나고 깊은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우레와 같이 소리친다'라는 뜻을 취한 이름이다.
벗 안분당 권규의 죽음을 곡하였다. 안분당과는 선대부터 교분이 있었으며, 김해로 남명을 찾아보고 나서는 아들을 보내 배우게 하였다. 안분당의 묘자리는 남명이 직접 정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9세(1549년)
8월에 거창의 감악산을 유람하였다. 이 때 함양의 유생들이 달려와 모시고 함께 놀았는데, 여기서 욕천(浴川)〉 시 한 수를 남겼다.
정인홍, 이광우, 이광곤, 문익성 등이 와서 배웠다.
51세(1551년)
이 해에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2세(1552년)
부실 은진 송씨로부터 아들 차석(次石)을 얻었다.
삼족당 김대유의 죽음에 곡하였다.
53세(1553년)
퇴계의 편지에 답하였다. 당시 남명은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 때 대사성으로 있던 퇴계가 벼슬에 나오도록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남명은 벼슬에 나아갈 시기가 아님을 들어 거절하는 답장을 보낸 것이다.
55세(1555년)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를 사직하는 '을묘사직소(일명단성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국정의 폐단을 논하고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한 것인데, 그 속에 '대비께서는 사려가 깊으시나 깊은 궁궐 속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아드님에 지나지않습니다' 라는 구절이 있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왕은 이를 보고 남명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구절은 이미 송나라 시대에도 전례가 있었다는 일부 대신들의 만류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57세(1557년)
아들 차마(次磨)가 태어났다.
58세(1558년)
진주목사 김홍, 황강 이희안, 이공량, 구암 이정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람록인 〈유두류록)을 지었다.
59세(1559년)
조지서사지 (造紙署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황강 이희안의 죽음에 곡하고 묘갈문을 지었다.
60세(1560년)
아들 차정(次矴)이 태어났다.
61세(1561년)
지리산 덕천동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강학하였는데, 산천재는 주역 대축과의 뜻을 취하여 지은 이름이다.
62세(1562년)
송계 신계성의 죽음에 곡하고, 묘갈문을 지었다.
63세(1563)
김우옹이 문하에 찾아와 배웠는데, 이 때 남명은 항상 차고 다니던 성성자(별)를 풀어 주면서 수양에 정진하도록 하였다.
남계서원을 찾아 분향하고 제자 강익과 함께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중인 벗 갈천 임훈을 방문하여 위문하였다. 당시 인근의 유생이 몰려와 덕유산 남쪽의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할 것을 권하였으나, 선생은 이번 방문은 오직 갈천을 위문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 것이니 다음에 같친과 함께 유람하겠다고 거절하였다.
64세(1564년)
퇴계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생은 당시 선비들이 손으로는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이러한 폐단은 퇴계와 같은 사림의 장로가 꾸짖어 바로 잡아 줄 것을 당부하였다.
65세(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수우당 최영경이 문하에 와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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