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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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태어남에 체격이 우람하고 용모가 빼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정중함이 어른과 같아 또래들을 따라 장난치지 않았고 놀이 도구도 또한 손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판교공이 사랑하여 말을 할 때부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시와 글(詩書)을 가르쳤는데 응대하여 문득 글귀를 외워 잊지 않았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모부인이 근심스런 안색을 지으니 공이 자세를 가다듬고 기운을 내어 거짓 차도를 보이며 고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부여한 바가 있어 저에게 이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찌 오늘 갑자기 요절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듣는 이가 비범하게 여겼다.
점점 자람에 온갖 서적을 널리 통달하였고 특히 좌구명(左正明) 류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좋아하였으니 이런 까닭으로 문장이 특이하고 고상(奇高)하면서 기력(氣力)이 넘쳤다. 사물을 읊고 일을 기록함에 처음부터 뜻을 기울이지 않은 듯 하였으나 말이 엄하고 뜻이 세밀하여 엄연히 법도가 있었다. 과거로 인하여 유사(有司)에서 문예(文藝)를 비치니 유사가 대책(對策 : 과거 시험의 일종인 책(策)에 대한 답안)을 보고 크게 놀라 일등 ·이등으로 발탁한 것이 무릇 세 번이었으며 고문(古文)을 배우는 이들이 다투어 전하여 암송하면서 본보기로 삼았다. 가정(嘉靖) 5년(1526)에 판교공이 세상을 떠나니 공은 한양(京師)으로부터 상여를 받들어 고향의 선산에 인지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와서 받들어 봉양하였다.
공이 어느 날 글을 읽다가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말 중에 '이윤(伊尹)의 뜻을 뜻 삼고 안연(顔淵)의 학문을 배우라' 는 글귀를 보고는 깊이 깨달아 발분하고 뜻을 가다듬더니 육경(六經) ·사서(四書) 및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가 남긴 책을 강송하며 이미 하루 해를 다하고 또 밤중까
지 계속하면서 힘을 다하고 정신을 쏟아 연구 탐색하였다. 공은 학문에는 경(敬)을 지니는 것보다 요긴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에 집중하는(主一) 공부에 전념하여 밝게 깨어 혼매(昏昧)하지 않았으며 몸과 마음을 거두어 지켰다. 또 학문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기(克己)에 힘써서 찌꺼기를 씻어 내고는 천리(天理)를 함양하였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였고 깊은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성찰하여 이 이미 정묘한 가운데 더욱 그 정묘함을 구하였고 행함에 이미 힘쓴 가운데 더욱 그 힘을 기울였으며 몸소 돌이켜 체험하고 실지를 많는 것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그 경지에 도달함을 구하였다. 중종(中宗) 24년에 모부인 강을 당하여 선친의 묘 왼편에 장사하였다.
공은 지혜가 밝고 식견이 높아 진퇴의 기미를 잘 살렸으니 일찍이 스스로 보건대 세도(世道)가 상실되어 인심이 이미 그릇되고 풍속이 각박해져 성현의 가르침(人敎)이 침체 되었으며 또 현인의 비슬길이 기구하여 재앙의 기미가 은밀히 드러나니, 이 때를 당해서는 비록 교화를 만회시킬에 뜻을 둔다 해도 도(道)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결국 내가 배운 바를 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과시에도 나가지 않고 벼슬도 구하지 않았으며 뜻을 거두어 산야에 은둔하였으니 남명(南冥)이라 스스로 호를 짓고 그 정자를 산해(山海)라 일컬었으며 사(舍)를 뇌룡(龍)이라 하였다. 최후에는 두류산 수굴운동(水窟雲洞)으로 들어가 8~9개의 서까래를 얽어매고 산천재(山天齋)라 편액하였으니 몸을 깊이 감추어 스스로 닦은 지 수 년이 되었다.
중종조(中宗訓)에 천거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에 또 유일(遺逸: 산림의 어진 선비)로서 재차 전생서(典牲署)·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제수하고 이어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옮겼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하여 글을 올려 이르기를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민심이 이미 떠났으니 그 반전의 기틀은 구구한 정치와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사지 (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또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 들여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할 때에 주상(主上)이 치도(治道)를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치(治)은 책 속에 실려 있으니 신(臣)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컨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과 의리(情義)가 서로 부합하여 환연히 틈이 없어야 더불어 다스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신하 대접하기를 벗과 같이 하여 더불어 정치의 법도를 밝혔으니 신하의 말을 듣고 칭찬하며 감탄한 성대함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야흐로 이제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서로 흩어짐이 마치 어지러이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마땅히 서둘러 구하기를 불난 집에 불을 꺼는 것과 같이 하여
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또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학문은 다스림을 내는 근원이고 학문은 마음으로 체득함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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