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깨달음을 이루던 날 밤에 부처님은 세상에 실재하는 요소들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부처님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들은 의미론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갈애(渴愛)가 일어나는가? 무엇이 갈애의 조건이 되고 있는가?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주어진 조건을 만들거나, 낳거나, 산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정지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라는 실체가 있을 때 무엇으로 부터 기인하였는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실체의 조건이 되었나를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들에 이어지는 단언과 뒤이어 설해지는 인과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조건들을 열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이 연기로 설명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방식입니다.

 원효스님이 지난밤 어둠속에서 목이 말라 물을 마실 때는 분명히 맛있는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물은 없고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방식은 이처럼 목이 마를 때는 있었고 날이 밝았을 때는 없다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무덤 속에 있는 물은 본래부터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해골 속의 바가지에는 구더기가 살고 있습니다. 그 구더기에게는 그 물이 가장 깨끗하고 향기로운 물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깨끗한 물이라고 하는 것이 구더기에겐 더 역겨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본래부터 더럽거나 깨끗한 물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은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도 없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인식되고 있는가를 반문할 것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깨끗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가지고 이 생각에 상응하는 것을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원효스님이 목이 마를 때는 그 물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그 물은 깨끗하고 좋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물은 맛있고 깨끗한 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물은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조건에 상응한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은 더러운 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 잘 살고 있는 구더기에게는 삶의 원천일지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인식되는 모든 존재는 우리의 삶과 관계해서 우리에게 인식된 것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무작정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따지지 말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는 이처럼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이런 발상이 연기법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무엇의 문제'에서 '어떻게' 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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