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관 김해시 기획예산담당관

이병관 김해시 기획예산담당관

국토부가 지난 7월 발표한 2017 도시계획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91.81%가 도시지역에 거주한다고 한다. 1960년에는 도시지역 인구비율이 39.15%였다고 하니 불과 50여년 만에 농촌인구의 대부분이 도시지역으로 흡수된 것이다.(도시지역이 행정구역 상 특ㆍ광역시, 시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위 통계가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현상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도시의 성장은 과거부터 도시에 살고 있던 원주민뿐만 아니라 이주민과 함께 이루어졌다. 단순한 숫자만 따지면 대다수 도시의 구성원은 본래 타 지역에서 이사 온 이주민이다.

 필자가 몸을 담은 김해시도 1960년에는 4만 여 명의 '읍'이었다. 그러나 김해읍이 시로 승격한 후 마침내 1995년 김해시와 김해군이 통합하여 인구 25만 명의 도농복합시가 되었고, 지속적인 도시화와 산업화로 2018년 현재 인구 55만 명의 전국 14번째 대도시(기초지자체 단위)가 되었다.

 급격히 성장한 도시는 필연적으로 과거의 흔적을 조금씩 잃어가게 된다. 2천년 가야 유산을 간직한 김해시의 아침도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높은 빌딩 사이로 바삐 출근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경전철이 도심지를 가로 지르고 수많은 자동차가 오가는 모습을 보면, 필자가 사는 김해시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도시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가 가진 역사성은 도시의 진화와 함께 사라져가야만 하는가? 도시의 발전을 위해 도시의 역사는 배제되어야 하는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도시의 진화와 역사는 하나의 연속성에 있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도시가 가진 역사문화자원은 급격한 발전을 겪어온 도시 주민들에게 정신적으로, 공간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마침 김해시가 가진 역사문화자원은 타 도시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종류의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김해는 가야문화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 금관가야의 수도이다. 김해시와 같이 한 국가의 중심지였던 도시는 서울, 경주, 공주?부여 등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해시는 몇 해 전부터 ‘가야왕도 김해’라는 도시브랜드를 개발하여 도시 정체성과 시민 자긍심을 널리 알리고 있다.
 
 물론 가야 역사문화가 김해시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가야제국의 영역은 영호남에 걸쳐져 있고 타 시군에도 많은 가야의 유적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해가 '가야왕도'인 이유는 무엇일까?
 
 기록이 부족한 가야사에서 가야의 여러 나라 중 금관가야는 유일하게 시조왕인 김수로왕부터 마지막 10대 구형왕까지 왕의 계보가 전부 남아 있다. 또한,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을 비교해 볼 때, 1~4세기 당시 가야지역의 문화 중심은 김해, 부산, 창원을 둘러싼 경남 해안지대였고, 그 중에서도 김해 지방의 출토 유물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우월성을 보인다.

 전국의 가야유적 중 국가지정 사적지의 70%가 경남도내에 있는데 도내 사적 28건 중 30%가 넘는 9개소가 김해에 밀집하고 있고, 가야 관련 도지정문화재 13건 중 50%인 6개소가 김해에 있다. 또 김해의 가야 관련 비지정문화재는 40개소로 집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80여 개소에 달한다.(다라국이 있던 합천의 경우 6개소, 소가야의 고성은 36개소, 비화가야의 창녕은 36개소, 대가야의 고령은 21개소임)
 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기존 조사 성과와 '김해군읍지(金海郡邑誌)' 중 수로왕궁터 기록을 근거로 수년 전부터 김해 봉황동 일대의 가야왕궁지를 발굴하고 있다.

 한편, 국립박물관이 한 시도에 1개소로 정해져 있으나, 경남의 경우 유일하게 2개소의 국립박물관이 있다. 이는 가야문화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국립김해박물관이 추가로 건립되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김해 외에도 경남도내 가야 각지의 유물과 더불어 경북과 부산 등지의 가야유물도 모두 전시 및 관리하고 있다. 이는 김해가 가야문화의 중심이자 핵심지임이 공인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해시가 '가야왕도 김해'를 표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역사문화가 담은 '상생과 화합'이라는 가치에 있다. 수로왕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이주민인 아유타국 허황옥공주를 맞이하여 국제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또, 가야고분군에서 발굴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도 북방계와 남방계 인골이 골고루 섞여 있고, 출토되는 유물 또한 중국의 북방, 일본계 유물뿐만 아니라 멀리 중동지역의 유물도 나오고 있다. 가야시대 김해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교역 중심이며, 수많은 이주민들이 살기 좋은 김해를 찾아와 정착했다는 방증이다.

 현대의 김해시도 원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성장한 도시라고 한다면, 과연 '가야왕도 김해'만큼 김해를 대표할 도시브랜드가 있을까?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