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에 한 번 잘못이 있으면 역사책에 기록되어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 ” 옛날에 승록대부나 승정대부에게 도승지를 겸임시킨 것은 그 직책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 어질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하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정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다고 하였는데 이런 때에 있어서 좋은 의견은 제의하고 좋지 못한 일은 말리지 못하였으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조정에 가득한 신하를 치고 누가 나랏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새로 벼슬길에 나선 선비이므로 아예 현행정사를 모릅니다.
둘째의 경우 백년 묵은 나무의 속을 벌레가 먹어 썩어가는 형상의 국사에서 날로 민심이 이반되는 데도 악덕 관리가 요직에 있으면서 갖은 술수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대왕대비와 어린 왕의 위치로는 깊은 폐단을 끊을 수 없는 상환ㅇ내 서 나약한 국정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고 진단하여 부임을 거절한 것이다.이때 승지 백인연, 신희부, 윤옥, 박영준, 심수경, 오상 등은 남명의 상소문이 말 같이 않다고 전제하면서 경상도의 감사가 받아서 올려보냈으니 승정원서 하는 수 없이 가지고 들어와서 보고하였다고 변명하였다.즉, 승정원 관리들이 남
1) 대체로 사관의 평가는 긍정적으로 그 요지를 약하면 ① 남명은 시골에 묻혀 있는 선비지만 어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벼슬을 가벼이 여기지만 왕과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스런 마음을 지닌 까닭에 글이 곧고 문제를 바로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② 남명은 자신을 맑게 수양하면서 재주를 드러내지 않고 초야에서 살고 있으면서 공명을 얻을 기회가 왔는 데도 마다했고, 더욱이 가난한 살림에 스스로 만족하며 지조를 지킨 점이다. ③ 관직을 사양했다고 해서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정대신 보다 더 극렬한 논의로 시정을 지적한 점이 간절하다.
전번에 이희안(본향은 초계이다. 성품과 행실이 단정하고 공손하였으며 파묻혀 있는 선비로서 명성이 당대에 높았다. 임금의 부름을 받고 고령현감으로 있었으나 벼슬살이를 겨우 3년 동안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이 벼슬을 버리자 전하는 잡아다가 추궁하자고 하였다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식과 희안은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미 희안을 잡아다가 추궁하자고 하였을 뿐 아니라 문구가 공손하지 못하다는 것은 모르고 전하가 선비를 대하는 방법이 옛날 제왕들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선비들의 기개는 꺾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
시골에서 어렵게 살고 있으면서도 명예와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며 여러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서지 않고 지조를 고상하게 지켰다. 비록 영예로운 고을원의 벼슬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대바르게 쓴 글을 올려 현행정사의 폐단을 곧바로 찔렀으니 이것이 어떻게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모르는 사람이겠는가. 대왕대비를 깊숙한 궁중에 있는 과부의 몸이라고 한 말은 조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옛날 어진 선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공순하지 못한 말이겠는가. 높이 평가해 줄 대신에
지금 나라의 심장에 병이 꽉 들어차서 위와 아래가 통하지 않고 있으므로 높은 관리들이 입이 마르도록 논의하면서 분주히 돌아치고 있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충실할 것을 호소하여 나랏일을 수습하는 방도는 구국한 정사나 형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한마음을 다 받쳐 크나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 그 관건은 전하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학문을 좋아합니까, 음악과 이색을 좋아합니까, 활쏘기 말타기를 좋아합니까, 군자를 좋아합니까, 소인을
1555년(명종 10년) 11월 19일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다. 경술일, 단성현감으로 새로 임명된 조식이 글을 올렸다. “생각하건대 선대임금은 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인 것을 모르고 처음으로 참봉벼슬에 임명하였고 전하가 임금자리를 계승하자 주부의 벼슬에 두 번이나 임명하였으며 이번에 또 현감으로 임명하였으므로 몹시 두렵기만 하여 마치 모기가 산을 진 것만 같습니다. 아직도 전하의 앞에 가서 크나큰 은혜를 사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마치 목수가 재목을 얻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깊은 산과
1552년(명종 7년) 3월 9일 신묘일.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 초계에 사는 전 전옥서 참봉 이희안이 삼가에 사는 벼슬하지 못한 선비 조식을 추천하였다. 또한 청렴하고 근실한 고을원들인 상주목사 전팽령, 영천군수 김취문, 지례현감 노진을 추천하였다. 희안은 재주와 품행이 뛰어나고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다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3년상을 입은 동안에 집에 한번도 가지 않았으며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 중종 때에 추천하여 벼슬을 주었으나 사례한 뒤에 시골로 돌아갔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관청에
광해군 일기에 실린 남명 기사1617(광해 9) 4월 27일(신유) 곽재우 졸기 조식의 외손서1617(광해 9) 7월 12일(갑술) 호남 사람이 조식의 서원을 강진에 세우고자 함1617(광해 9) 7월 13일(을해) 정원서 조식을 문묘종사하도록 건의1617(광해 9) 9월 4일(병인) 생원 이덕무가 조식을 문묘종사할 것을 청함1617(광해 9) 9월 10일(임신) 합천 생원 유진정 등이 문정공 조식의 문묘 종사를 청함1617(광해 9) 9월 21일(계미) 사헌부에서 조식의 학문은 수사의 학문을 전수 받았고 도맥은 염락에 접맥되어 있
-사후시기-1595(선조 28) 2월 8일(신해)서리폐단을 사관이 인용1601(선조 34) 10월 25일(기축)경상하도의 풍속은 조식이 있어 절의를 높였기 때문1602(선조 35) 2월 7일(경오)사관이 최영경의 옥사에 대한 공론을 논함1602(선조 35) 2월 30일(계사)명종조의 처사 조식이 서리의 폐단을 극렬 말한 것은…1602(선조 35) 4월 22일(계축)김우옹 홍문관 부제학, 김우옹은 소시 적에 고처사조식을 사사함1602(선조 35) 9월 25일(갑신)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고제임『선조수정실록』1568(선조원년
-생존시기-1540(중종 35) 7월 16일(을사)병조참지 이임과 대사성 이언적이 조식을 천거, 헌능 참봉제수 불취1552(명종 7) 3월 9일(신묘)초야선비 발탁논의 초계의 이희안 등 4명을 추천1552(명종 7) 7월 11일주부로 임명하라고 지시1552(명종 7) 10월 2일(신해)전생서 주부로 임명1553(명종 8) 윤 3월 18일(갑자)사도시 주부로 임명1553(명종 8) 윤 3월 26일(임신)예빈시 주부로 임명1553(명종 8) 5월 6일(신해)성제원, 성수침, 이희안, 조욱 등과 함께 6품 벼슬에 임명1555(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인의 역사가 아닌 당대의 정치사회 모든 면을 가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존중한다. 비록 시대적 상황이 다를지라도 동일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공통된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문제를 파악하는 자료로서 앎의 해석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남명에 관한 모든 기록을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한 사관(史官)의 붓이 『조선왕조실록』에 여과없이 남아있다. 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5년간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기록이 편년체로 남아있다. 기록에 참여한
남명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인생관을 확고히하여 수양(修養)을 통하여 채찍질함과 동시에 엄격하여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좌우명을 짓고 사물마다 명사를 새겨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참고로 사전에 의하면 명(銘)의 뜻은 '새긴다(각야 刻也)'이다. 곧 명은 기물에 글을 새겨 넣는다는 뜻을 지닌다.≪동문선≫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명은 <도솔원종명 兜率院鐘銘>이다. 자상(慈尙)이라는 스님이 발원하여 만든 도솔원의 종에 김부식(金富軾)이 쓴 명이다. ≪동문선≫에는 이 밖에 이규보(李奎報)·이색(李穡) 등의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청학동의 유래가 존재해 오던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삼신봉(三神峰) 동쪽 능선 아래 해발 800m 고지인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산촌으로 현재는 도인촌으로, 특정 종교의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종교취락의 성격을 지닌 오지 마을이다. 지리산 청학동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으로 노인의 구전에 근거한 것이었다. 청학동에는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는 지원 병사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거주하였고,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10
남명이 산해정에서 정착하여 몇 해 지난 44세 때(1544) 6월 외아들 차산(次山)을 잃었다. 위로 외동 딸은 일찍이 김해 만호 김행(金行)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겨우 9살로 무척 사랑하였다.남명은 슬픈 나머지 시를 지었다(喪子).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靡室靡兒僧似我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無根無帶我如雲 한평생 보내면서 어쩔 수 없었는데 送了一生無可奈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 흰눈처럼 어지럽도다. 餘年回首雪紛紛 적막한 산속에서 외로이 서책만 보며 가끔 먼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을 잃은 슬픔에
남명이 을묘사직 상소를 올려 벼슬을 거부한 이면에는 당시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와 외척 윤원형의 세도와 폭정 때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 ~ 1565)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왕비이자 13대 왕 명종의 모후로서 명종대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윤원형과 결탁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런 까닭에 윤원형을 미워하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하여 절대 반대하였다. 윤원형(尹元衡 ? ~ 1565년·명종 20)은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1537년 권신인 김안로
남명이 산해정(山海亭)에 강학처를 정하고 잠시 세상사를 잊고 공부에 전념할 적에 친구 이준경 영의정이 보낸 심경(心經)을 31세 때 받고서 매우 기뻐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친구 송인수가 보내준 대학(大學)을 받았고, 44세 때 이림(李霖 1495~1546)이 심경을 보내 주었다. 친구로부터 책을 받고는 고맙다는 서찰을 보내고 책 후면에 자신의 심정을 꼭 적었다. 당시 가난한 선비에게 귀중한 책 한권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행복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책보다는 보석 같은 물질을 선호하지만 공부하는 선비 에겐
남명사상의 핵심은 경의(敬義)다. 남명은 1555년(명종10) 단성현감을 제수 받고 을묘사직상소를 올려 사직의 변과 군왕의 통치방향을 주청한 바 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568(선조 1)년 선조가 뒤를 이으면서 재야의 학덕 높은 선비를 우대하는 정책으로 남명을 불렀다. 이에 남명은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국책을 논하면서 군왕의 자질과 통치학을 구체적으로 강론하였다. 그 상소문에서 일부분을 옮겨본다. "백성을 잘 다스리는 도는 다른데서 구할 것이 아니오라, 요점은 임금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 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남명 정신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문집에 산재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명종 10년(1555)에 임금에게 올린 〈乙卯辭職疏〉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丹城縣監에 새로 제수 된 曺植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주상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는데 선왕(중종)께서는 제가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로 제수하신 것이 두 번 이었는데 지금 또 제수하여 현감으로 삼으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벼슬에 나아가
온 산하가 녹음방초로 가득하다. 비온 뒤 길가의 풀이 한자나 자라서 제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농촌에서는 설익은 보리밭을 보고 언제 타작하여 보리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을가 하고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이 생각난다. 우리가 어릴 적에 '보릿고개'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 고개를 넘기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는 기다림에 애를 태운 기억이 난다. 지금은 보리밥을 향수처럼 찾아 별미로 맛보는 정도지만 어릴 적 하도 많이 먹어 질려서 보기도 싫다는 사람도 있다. 남명이 김해생활에서 겪은 농촌은 그가 지은 시 〈분성